양식의 양식

식탐(食貪)보단 식탐(識貪)!

 

“결국 식당 사업에서는 맛 못지않게 스토리텔링이 중요하다”

백종원 대표의 말입니다. 모든 사업에서 사업의 본질도 중요하지만 의외로 스토리가 차지하는 비중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음식의 맛 보다는 원조를 강조하는 이유도 마찬가지 입니다. 누구보다 먼저 시도했다는 스토리를 기억하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음식마다 우리의 삶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음식의 맛 속에 우리의 역사와 전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허기를 때우기 위한 음식이 아니라, 스토리가 맛으로 버무려집니다. 아는 만큼 맛의 깊이도 달라집니다.

음식을 탐사하고, 음식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의미를 세계의 여러 음식과 비교할 때 스토리의 진가는 더욱 빛날 것입니다.

 


양식의 양식 한식에서 건진 미식 인문학
송원섭, JTBC[양식의 양식] 제작팀 저 | 중앙북스(books) | 2020년 10월 14일

 

이 책은 익숙하지만 낯선, 한식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스토리가 더해집니다. 한식을 대표하는 많은 음식 중에 한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8가지를 선정하였습니다. 삼겹살, 냉면, 치킨, 백반, 국밥, 불+고기, 짜장면, 삭힌 맛이 그것입니다. 이 8가지만 선정했다는 것은 아마도 다음 시리즈를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 TV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8개월여가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준비기간까지 합치면 1년 넘게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제작기간에 비해 TV에서 보여지는 것은 한정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책은 TV 프로그램을 기획한 프로듀서로서 TV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것에 대해 추가적인 근거와 배경을 자세히 전달하기 위해 썼다고 합니다. 저자는 송원섭 입니다. 현재 JTBC 보도 제작국 교양담당 부국장입니다. 기자 출신의 CP입니다.

<양식의 양식> 방송이 나간 뒤로 많은 피드백을 받았습니다만, 누구보다 아쉬운 것은 저희 제작진이었습니다. 사실 방송으로 보여드린 내용은 그간 고민하고 고생해 카메라에 담은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일부분이었을 뿐입니다. 그런 아쉬움도 이 책이 나오게 된 계기 중 하나입니다. 아마 방송을 보신 분들은 책을 보면서 ‘아, 그래서 그때 이런 얘기가 나왔던 것이구나!’하실 것이고, 책을 먼저 접하시는 분들은 내용 속의 별미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영상을 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18쪽

저자가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글이 깔끔하고, 문장이 쉽게 읽힙니다. TV를 보지 않았더라도 상황과 내용이 그려집니다. 읽는 내내 소개하는 음식이 땡기는 것을 보면 더 이상 말이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 소개된 식당이 아는 곳이라면 가봤다는 이유만으로도 책에 더 몰입되는 것 같습니다.

음식을 통해 우리 삶을 볼 수 있습니다. 음식의 뿌리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음식이 유행하게 된 역사적 사실도 새롭게 알 수 있습니다. 방송에 참여한 패널들의 다양한 의견을 통해 지식을 전달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방송으로 한번 스치는 것 보다 글을 통해 오래오래 볼 수 있다는 것에서 기억에 더 오래남게 하는 것 같습니다.

1997년, IMF를 맞으며 분위기는 일변했다. 자본을 한껏 키워 지속적인 호황에 대비하고 있던 기업들은 순식간에 과도해진 부채 비율과 고금리 때문에 부도를 맞았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남아 있던 기업들도 긴축에 들어갔고, 전체적으로 소비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소고기를 먹던 사람들이 씀씀이를 줄여 삼겹살을 굽는 불판 앞으로 모여들었다. 경기가 악화되었는데 삼겹살 장사는 오히려 잘 되는 시절이 온 것이다.
정채찬 교수는 이 시절의 삼겹살 굽는 풍경을 너무나 적확하게 묘사한 시로 1998년 발표된 안도현 시인의 <퇴근길>을 소개했다.
삼겸살에 소주 한잔 없다면
아, 이것마저 없다면48쪽
우선 육개장, 잘 알려진 대로 육개장의 모태가 된 음식은 개장국, 즉 보신탕이다.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개고기 국을 끓이는 양념 그대로 고기만 소고기로 바꿔 끓인 것이 육개장이다. 이런 사연을 모르는 사람들이 ‘육계장’이라고 쓰는 경우가 있는데, 육개장은 ‘소고기로 끓인 개장국’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음식의 발상지가 대구이기 때문에 육개장을 ‘대구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갈비로 유명한 서울 을지로의 조선옥에 가면 요즘도 대구탕이라는 음식을 판다. 간혹 이 대구탕을 생선 대구를 넣고 끓인 매운탕인 줄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구탕이라는 이름으로 육개장을 판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곤 한다.221쪽
불고기를 먹다가 갈비구이를 먹고, 갈비를 먹다가 다시 꽃등심을 먹고, 이제는 꽃등심으로 성이 차지 않아 미디엄레어로 스테이크를 먹는 과정이 바로 소고기의 섭취가 그저 맛이나 영양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과시와 허세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권력과 재력을 갖춘 자들은 항상 남들과 다른 소비를 원한다. 따라서 어느 순간 불고기가 ‘웬만한 사람은 다 먹는 음식’이 되면, 자신의 소비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형태의 고기를 먹으려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의도적이기보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과시의 문화 속에 편입된다는 점에서 경제학적인 의미를 갖는다.258쪽

종합적인 의견을 통해서 새로운 인사이트도 얻을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한식을 지키기 위해 고민해야 될 사항도 언급합니다. 책 표지에 나오는 ‘한식에서 건진 미식 인문학’이라는 부제가 그냥 단순히 지어진 것이 아니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양식의 양식>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한국인이 닭을 소비하는 방식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한국인은 유독 닭을 식용으로 소비하는 데 있어 ‘한 마리’를 통으로 소비하는 데 큰 의미를 둔다는 것이다. 통닥은 말할 것도 없고, 치킨도 반드시 ‘한 마리’가 단위가 된다. 백숙도 마찬가지. 심지어 백숙의 변형으로 ‘닭 한 마리’라는 이름의 음식까지 있다. 반면 중국의 깐풍기나 라즈니 같은 튀긴 닭을 이용한 음식, 일본의 가라아게는 분량을 닭의 마릿수로 구분하는 법이 없다.158쪽
방송에서 채사장이 말했듯, 냉면은 이제 두 갈래로 나뉜 길을 가야 한다. 한쪽에는 미식가들의 찬사를 받는, 완성도 있는 맛을 추구하는 냉면의 세계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야말로 대중의 음식인, 싼 맛에 먹는 냉면이 있다. 등심이나 삼겹살, 돼지갈비를 먹고 나서 입가심으로 먹는 냉면이나 김밥, 유부초밥, 떡복이와 함께 분식점에서 팔리는 냉면이 후자의 영역에 속한다. 마트에서 살 수 있는 새콤달콤한 1,000원짜리 육수 한 포와 공장에서 뽑은 냉면용 갈색 면만 있으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냉면이다. 이 두 가지 냉면을 ‘냉면’이라는 같은 이름 때문에 한데 묶는 것은 누가 봐도 부당한 일이다.117쪽
이런 일련의 개혁 실패로 인해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백반 문화는 현재 위기에 놓여 있다. 그런 서비스를 6,000~7,000원에 제공하는 것은 결국 60대 이상 아버지, 어머니 세댸의 노동 봉사를 전제로 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자신들의 인건비를 투자한 결과가 ‘싸고 푸짐한’ 백반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손님들도 인정해야 한다. 삼각지 골목식당에서 백종원 대표가 “이제 이런 업태는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 바로 ‘주인들의 인건비’를 지적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다음 의문이 떠오른다. 이렇게 인건비를 자기 부담으로 하는 세대가 은퇴한 다음에도, 과연 이런 백반 전문 식당이 가능할 것인가?194쪽

책을 읽고 나서는 꼭 TV프로그램을 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자의 의도를 거부하지 못합니다. 어찌보면 ‘홍보도 이렇게 할 수 있겠구나’ 라고 머리를 스칩니다. 아니나 다를까 현재 차기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콘텐츠에 대해 계속 관심을 가지게 하는 방법, 재방송이나 감독판 영화로 관심을 끄는 것 보다, 글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음식. 하지만 몰랐던 많은 스토리들. 맛을 통해 배부름을 알기 보다 지식을 통해 양식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기준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정재찬 문학평론가가 추천사에서 이야기 한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많은 한식들에 대한 이야기도 기대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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